재화적 성격의 문화재 체제에서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문화‧자연‧무형의 국가유산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의 왕궁 외곽담장과 건물지, 석축, 정원유적, 공방지 등의 내부시설이 확인되어 왕궁으로 일정기간 사용되다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 내고 그 자리에 탑, 금당, 강당 등 사찰이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왕궁은 폭 3m, 동서 245m, 남북 490m의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쌓고 내부에는 왕이 정사나 의례를 행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정전 건물지 등 14개의 백제시대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아울러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과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백제 최고의 화장실유적이 확인되었다.
백제 무왕대 말기나 의자왕대에는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탑, 금당, 강당 등 사찰건물이 들어서게 되는데, 백제 후기에서부터 통일신라기에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였던 것을 2019년에 최종적으로 보수정비를 마무리하였다.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익산 미륵사는 무왕(武王, 600-641) 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는 전형적인 1탑1금당의 백제식 가람배치와 달리 세 개의 탑과 금당 등으로 구성된 3탑3금당의 독특한 배치형식이다. 이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다. 창건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다.
남아있던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4.2m이고 상·하 이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전체 폭은 약 12.5m이다. 1층은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내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하였다. 기둥석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기법과 양 끝 모서리를 약간 높인 귀솟음기법이 반영되어 있다. 기둥석 하부에는 목조건물에서처럼 별도의 초석이 있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상ㆍ하 인방석(引枋石)과 기둥 상부에 평방석(平枋石), 포벽석(包壁石) 등이 구성되었다. 옥개부(屋蓋部)는 목조건물의 지붕처럼 모서리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석탑의 1층 내부에는 ‘十’자형 공간이 조성되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하며,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639년이라는 석탑의 건립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이듬해 해체수리가 결정되었고 2001년 해체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 조립공정이 완료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준다. 또한 고대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우리나라 불탑건축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639년(무왕 40) 절대연대가 기록된 금제 사리봉영기(金製 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사리외호(金銅舍利外壺), 금제 사리내호(金製 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이다.
‘금제 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음각되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즉 백제의 왕과 왕비의 장수와 왕조의 영원무궁을 빈 것으로 미륵사는 왕사로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봉영기는 그동안『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롭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게 되어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높다. 서체 역시 곡선미와 우아함이 살아있는 초당풍(初唐風) 양식을 간직하고 있어 백제서예의 수준과 한국서예사 연구에 필요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금동사리외호 및 금제 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서, 이러한 구조는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서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볼륨감과 문양의 다양성과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합 중 하나에 새겨진 백제 2품 ‘달솔 목근(達率目近)’이라는 명문을 통해 시주자의 신분이 최상층이고 그들이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가치와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서 희귀성이 높다. 청동합은 녹로(轆轤)로 성형한 동제 그릇으로서 그 일부는 우리나라 유기(鍮器) 제작 역사의 기원을 밝혀 줄 중요한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처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의 모습 그대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에 있어서 절대적 사료이자 기준이 된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와 백제 금속공예 기술의 역량을 응집해 탁월한 예술품으로 승화시켰으므로 한국공예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유물로서 위상이 높다. 7세기 전반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한편 동아시아 사리공예품의 대외교류를 밝혀주는 자료로서 역사적ㆍ학술적ㆍ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 석탑은 왕궁평성 중앙의 대지위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왕궁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높이 8.5m의 장중한 탑으로 1965년 해체보수되기 전까지만 해도 토단(土壇)을 갖춘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해체복원 결과 원래 돌로 기단(基壇)을 구성하였음이 밝혀져 이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 탑의 구조를 보면 기단부는 기단 면석의 각 면이 2개의 탱주(撐柱)와 우주(隅柱)가 조각된 3매의 돌로 깎아 맞추었으며, 하대 갑석 또한 1면을 3매의 돌로 쌓았다.
탑신부에 있어서 초층 몸돌은 각 면의 중앙에 1개의 탱주와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하였으며 전부 8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지붕돌은 층급 받침이 3단인데 지붕과는 별도로 4매의 돌로 조성하여 그 위에 지붕돌을 얹졌는데 지붕돌은 평평한 모습을 보이며 네 귀에서 가볍게 들리어 있어 전형적인 백제계의 석탑이라고 하겠다.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그리고, 부서진 보륜(寶輪) 1개가 남아있다. 1965년 해체 보수 중 제 1층 지붕돌의 중앙과 심초석(心礎石)에서 각각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지붕돌에 사리장엄구를 장치한 석재는 백제시대 주춧돌으로 사용한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좌우 두 곳에 4각형의 홈( 凹 )을 만들고, 뚜껑이 있는 금동제 함을 각각 장치하였다. 동쪽 금동제 함 속에는 금으로 된 뚜껑이 있는 네모꼴의 함이 들어 있었으며, 그 안에는 다시 금으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를 갖추고 연꽃형 뚜껑을 갖춘 녹색유리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서쪽 역시 금으로 된 뚜껑 있는 네모꼴의 함 안에서 금강경판(金剛經)이 발견되었다.
기단부의 심초석(心礎石)에 설치된 사리공은 ‘品’자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동쪽 구멍에는 배 모양의 광배(舟形)를 갖춘 청동여래입상과 청동방울이 들어 있었다. 북쪽 구멍에는 향류(香類)가 발견되었으나 서쪽 구멍은 일찍이 도굴 당하였다. 이들 금강경판 등의 사리장치는 국보 123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이 사리장치는 “관세음응험기”의 제석사지 화재기록에서 나오는 사리장치들과 내용이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탑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시대 설과 통일신라 설, 그리고 고려 초기 설이 대립되어 주장 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굴결과 탑의 하부(下部)에서 다져쌓기로 조성된 건물지 흔적이 발견되어 석탑의 조성 연대는 백제시대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남쪽으로 10리쯤으로 떨어진 들판에 금마를 남류하는 옥룡천(玉龍川)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약 200m 떨어진 마주 보며 서있는 두 기의 석인상이 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인석(人石)’이라 부르고 있다. 이 두 기의 석인상은 하나의 석주(石柱)에 머리부분부터 석좌(石座)까지 조각하였다. 석상의 머리위에는 높은 관을 얹었으며, 얼굴은 가늘게 뜬 눈, 작은 코, 가느다란 입술이 인상적인 모습이다. 어깨는 그대로 흘러내려 아주 좁게 처리하고 있다. 양팔은 복부 앞에서 손가락을 끼고 있으나 옷으로 가리워졌고, 옷의 문양은 목에서부터 평행선으로 흘러내려 양쪽 발등위에서 좌우로 벌어졌다. 석좌는 앞쪽을 깎아 모를 내었고 발등은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이 석상은 넘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철종 9년(1858)에 익산군수로 부임한 황종석(黃鍾奭)이 다시 세우고 ‘군남 석불중건기(郡南 石佛重建記)’의 비문을 남겼다. 그가 이 비문에서 “이 석불을 불상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에 불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석불중건기에는 “금마는 익산구읍의 자리인데 동․서․북의 3면이 다 산으로 가로 막혀 있다 그런데 유독 남쪽만이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虛虛)하게 생겼기에 읍의 수문(水門)의 허(虛)함을 막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금마의 주산(主山)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은데, 말에게는 마부가 있어야한다고 하여 마부로서 이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금마산을 마이산(馬耳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석상은 서쪽의 석상은 남자이고, 동쪽의 석상은 여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 두 석상 사이로 옥룡천(玉龍川)이 흐르기 때문에 이 둘은 평시에는 떨어져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 냇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두 석상이 서로 건너와서 끌어안고 그동안 맺혔던 회포를 풀다가 새벽에 닭이 울면 헤어져서 다시 제자리에 가 선다고 한다.
1985년 12월 1일 중요무형유산(현 국가무형유산)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호남우도농악에 속한다. 현 이리농악단의 역사는 김형순(金炯淳:1933년 출생. 익산시 남중동)이 1952년에 부안에서부터 이주해온 뒤 풍물계를 조직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김제·정읍·부안의 전문적 우도굿잽이들을 받아들이면서 높은 수준의 농악단을 양성해왔다.
이리농악은 치배(악기잡이:쇄납, 나팔, 사물, 법고), 기수(기잡이:용기, 농기, 영기), 잡색(양반, 대포수, 조리중, 창부, 각시, 무동)으로 편성된다.
치배 또는 군총이라고도 하는 농악수들은 그 역할에 따라 복색이 다르다. 보통은 흰색 중의적삼에 색동이 달린 반소매의 검은색 쇠옷이나 조끼를 입고 양쪽 어깨와 허리에 삼색띠를 두르며 머리에는 상모와 큰 종이꽃을 단 고깔을 쓴다.
다른 지역 농악과 다른 점은 상쇠의 부포놀이와 소고춤의 기법, 진풀이가 매우 다양하고 장구의 가락과 춤이 발달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교적 느린 가락을 쓰며, 영남 농악과는 달리 쇠꾼과 장고잽이를 위주로 가락을 구사한다. 가락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변주되어 다채롭고 풍류굿, 덩덕궁이(삼채굿)에서는 악절마다 맺고 푸는 리듬기법을 쓰는 등 가락의 기교가 뛰어나다.
초창기부터 지역적 특성을 살린 게 아니라 전라북도 전체의 우도농악 전문인들이 합세하였기 때문에 전문농악적인 성향이 짙다. 오늘날까지 마을의 역사와 그 명맥을 함께하는 민속예술로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예능보유자 김형순을 중심으로 하는 이리농악보존회에서 그 기능을 전수하고 있다.
이리향제줄풍류는 전라북도 익산 지방에서 전승되는 현악영산회상이라는 기악곡이다. 관악영산회상과 평조회상의 대칭으로 불리는 음악으로, 이들과는 조(調)와 악기 편성이 다르다. 1958년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리향제줄풍류는 거문고, 가야금, 양금, 단소, 해금, 대금, 피리, 장구 등 여덟 가지 악기로 연주한다. 곡목은 다스름부터 시작해 본령산, 중령산, 세령산, 가락덜이, 상현도드리, 세환입, 하현도드리, 염불도드리타령, 군악, 계면가락도드리, 양청도드리, 우조가락도드리, 풍류굿거리까지 총 15곡이다.
익산목발노래는 익산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요로 지게를 진 나무꾼들이 작대기로 지게의 다리인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던 노래이다.
목발노래란 산타령, 등짐노래, 지게목발노래, 작대기타령, 둥당기타령, 상사소리 등 6곡을 하나로 묶은 노래의 명칭을 말한다.
목발노래는 나무꾼들이 무거운 짐을 질 때, 가벼운 짐을 질 때, 빈 지게로 나갈 때 등에 따라 노래가 달라지므로 여러 가지 곡조의 장단이 나타나고 있다.
나무나 풀을 벨 때는 느린 진양조장단의 산타령을, 그 후 나무를 짊어지고 내려올 때는 느린 중모리장단의 등짐노래를 부른다. 마을로 돌아올 때나 나뭇짐을 지고 신바람이 나 있을 때는 엇모리장단의 지게목발노래와 굿거리장단의 작대기타령, 둥당기타령, 상사소리를 부른다.
익산목발노래는 농경문화의 꽃으로 비유되어 온 농요(農謠)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귀중한 음악이다. 익산시에 사는 박갑근씨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일대에 전승되는 민속놀이. 농기세배라고도 한다. 전라북도민속자료 제2호. 음력 정월 대보름과 그 전날 이틀에 걸쳐 진행된다. 서열이 정해진 여러 마을들이 농기를 매개로 하여 풍년과 발전을 기원하는 행사로 두레와 유교적 관습이 어우러져 있다.
불화는 불상과 함께 사찰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불교미술의 중요한 분야로서, 우리나라의 불화는 불교 도입 이후 벽화와 탱화의 형태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고려시대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탱화장이는 사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부처 혹은 보살의 초상이나 경전 등 불교의 세계관을 담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탱화는섬세한 선묘와 함께 색채 사용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해 거의 수행에 가까운 작업으로 불린다.
이삼열은 1945년에 태어나, 김일섭에게 한국불화를 사사받았다. 부산 금정사, 김제 금산사, 경주 불국사, 서울 학림사, 부산 선암사, 예산 수덕사, 정읍 내장사, 고창 선운사, 무주 안국사, 완주 봉서사 등 전국의 주요사찰에 단청과 불화 조성에 참여하였다.
이삼열은 김일섭으로부터 전수받은 밑그림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여 조성하고 있으며, 인물의 표현능력이 탁월하며, 필력과 채색 등 전반적으로 작품성이 우수하다.
호산춘은 익산시 여산면의 주산인 천호산(天壺山)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빚어지는 술이었기에 호산춘이라고 지칭하게 되었으며,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의 25대 조부인 이현러(1136~1216)가 1156년(고려의종)부터 1203년(고려신종)까지 47년간 판소부감사겸 지다방사(궁중의 살림·특히 임금의 음식관리)로 있으면서 궁중에서 빚어지던 술이라 하여 궁중주라고도 불리었다.
호산춘은 음식 관련 산림경제·양주방·임원경제십육지 등 16개 고문헌에 전부 소개되어 있으며, 조선 19세기의 학자 이규경(1788~1863)이 쓴 백과사전 형식의 책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조선의 4대 명주로 호산춘을 극찬한 바 있다.
1946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이연호는 가람 이병기의 동생이며 독립유공자 이병석의 장녀인 이경희의 4남으로,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아 호산춘의 중요성을 꺠달아 보존하면서 후배 양성을 위해 전수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3년에는 농식품부 주관으로 궁중술빚기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바 있다.
이곳의 지명은 성당포 또는 성포라고 전해오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조창지가 있던 곳이다. 조창이란 조세미를 수송하기 위하여 수로 요충지에 설치한 창고를 말하며 성당창은 8읍의 전세와 2읍의 대동미를 관장하였다고 한다. 대동미란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걷게 된 전세를 말하며 선조 41년 경기도부터 시행하여 전라도는 효종9년(1658년)에 시행하였다. 1662년에 세워진 성당창에는 5개의 조창과 2개의 야적장으로 대동미를 50여 년간 12척의 조운선으로 운송하다가 숙종40년(1714년) 조창 개축과 포구 확장으로 51척으로 증선하고 조세지역도 8개 읍으로 확대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마을굿 형태의 당산제를 순풍당에서 지냈는데 1719년 조운선이 당진 앞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고 침몰하여 현감이 파면되고 지방민들은 조세미를 다시 내야하는 피해가 발생할 즈음 조운선 관리원 함무장의 꿈에 한 노인이 신주 3개를 주어 그걸 받아들고 꿈에서 깨어 이상한 꿈을 궁리하다가 복희씨, 신농씨, 허원씨의 3신이라 생각하고 순풍당에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별신제라고 전해온다. 당산제와 별신제를 지내면서 함꼐한 풍물이 성당포 농악의 발생이다.
성당포농악은 호남우도농악의 영향으로 호남좌도농악에서는 볼 수 없는 굿가락의 다양한 분화와 세련미가 보이는 점으로 우도농악적인 “시김새”가 강하게 나타나는 점에서 확인된다. 성당포농악의 장구가락 기교를 말할 때 “장구 열채가락이 사람의 혼을 넣다 뺏다 한다”는 말은 장구 열채가락이 흩가락, 겹가락, 겹겹가락 등으로 미세하게 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화는 호남좌도농악에서는 볼 수 없는 호남우도농악의 기교와 세련미를 지향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충청도 웃다리농악의 영향은 쩍쩍이가락, 길군악칠채, 육채 등이 확인된다. 성당포농악은 금강수계를 따라 뱃길로 유입된 무주, 진안, 장수의 호남좌도 동북부 농악을 원형으로 마을 배후인 호남평야의 우도농악과 인접해 있는 부여의 웃다리노악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유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농악계에서 강조되어 온 지역적 전형성에 충실한 농악과는 달리 성당포농악은 각기 다른 농악의 기능을 접목한 새로운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속 문화는 보유전승의 지역사회에 그 전승된 특징을 갈고 다듬어 발전시키면서 존속시킬 때 존재가치가 높을 것이고 향토성과 역사성 속에서 협동적, 예술적 의의는 더욱 빛날 것이다.
전통적인 소재와 제작방법으로 붓을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곽종민은 조부부터 집안 대대로 전통붓 제작을 가업으로 잇고 있다. 실제 형 故 곽종찬 또한 전북특별자치도 모필장으로 지정된 바 있다.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천호산 자락 아래에서 붓공방과 전시장을 운영하며 국내 모필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후배 양성 등 전수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