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지명은 성당포 또는 성포라고 전해오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조창지가 있던 곳이다. 조창이란 조세미를 수송하기 위하여 수로 요충지에 설치한 창고를 말하며 성당창은 8읍의 전세와 2읍의 대동미를 관장하였다고 한다. 대동미란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걷게 된 전세를 말하며 선조 41년 경기도부터 시행하여 전라도는 효종9년(1658년)에 시행하였다. 1662년에 세워진 성당창에는 5개의 조창과 2개의 야적장으로 대동미를 50여 년간 12척의 조운선으로 운송하다가 숙종40년(1714년) 조창 개축과 포구 확장으로 51척으로 증선하고 조세지역도 8개 읍으로 확대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마을굿 형태의 당산제를 순풍당에서 지냈는데 1719년 조운선이 당진 앞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고 침몰하여 현감이 파면되고 지방민들은 조세미를 다시 내야하는 피해가 발생할 즈음 조운선 관리원 함무장의 꿈에 한 노인이 신주 3개를 주어 그걸 받아들고 꿈에서 깨어 이상한 꿈을 궁리하다가 복희씨, 신농씨, 허원씨의 3신이라 생각하고 순풍당에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별신제라고 전해온다. 당산제와 별신제를 지내면서 함꼐한 풍물이 성당포 농악의 발생이다.
성당포농악은 호남우도농악의 영향으로 호남좌도농악에서는 볼 수 없는 굿가락의 다양한 분화와 세련미가 보이는 점으로 우도농악적인 “시김새”가 강하게 나타나는 점에서 확인된다. 성당포농악의 장구가락 기교를 말할 때 “장구 열채가락이 사람의 혼을 넣다 뺏다 한다”는 말은 장구 열채가락이 흩가락, 겹가락, 겹겹가락 등으로 미세하게 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화는 호남좌도농악에서는 볼 수 없는 호남우도농악의 기교와 세련미를 지향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충청도 웃다리농악의 영향은 쩍쩍이가락, 길군악칠채, 육채 등이 확인된다. 성당포농악은 금강수계를 따라 뱃길로 유입된 무주, 진안, 장수의 호남좌도 동북부 농악을 원형으로 마을 배후인 호남평야의 우도농악과 인접해 있는 부여의 웃다리노악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유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농악계에서 강조되어 온 지역적 전형성에 충실한 농악과는 달리 성당포농악은 각기 다른 농악의 기능을 접목한 새로운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속 문화는 보유전승의 지역사회에 그 전승된 특징을 갈고 다듬어 발전시키면서 존속시킬 때 존재가치가 높을 것이고 향토성과 역사성 속에서 협동적, 예술적 의의는 더욱 빛날 것이다.